나민님 칼럼 [야, 이 걸레야]
2018년 03월 28일 작성

10대인턴 나민님 콘텐츠 #2 칼럼 [야, 이 걸레야]

야, 이 걸레야.

네가 너무 소중해서, 닳을까 봐 지켜주고 싶어

 


 

야, 이 걸레야.

 

나는 이 말이 타당한 비난으로 납득되는 상황에 실소를 그칠 방도가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의 실소와는 무관하게, 일상 속에서 ‘걸레’ 라는 말은 꽤나 많은 동요를 가져온다. 아마도 우리는 ‘걸레’ 라는 단어가 어떤 상황에서 사용되는 지 그리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 많은 힘이 필요하지도 않으니 한 번 상상해 보자.

 

 

이 보편적인 욕설은 수고롭게도 많은 동의 속에서 성립되었다. 우리가 “걸레” 라는 말을 욕설로써 그리 어색하지 않게 느낀다는 의미는 우리가 ‘걸레’로 하여금 욕설로 기능하도록 동의한 것들이 여전히 잘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확인해 보자면 이런 것들이 있다. 문란하다는 것은 수치스럽다, 여자는 몸을 잘 보관해야 한다, 상황과 무관하게 그저 성관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납득될 수 있어야 한다, 성관계를 했다는 사실을 수치스럽게 생각해야 한다. 등과 같은 더 많은 말들.

 

 

먼저의 의문은 이 동의들에 있다. ‘걸레’ 라는 말에 동조하는 웃음들과 수군거리며 거리를 두는 시선들, 그 말을 들었을 때 사로잡혀야 하는 수치심, 그것들은 대체 어떻게 가능해진 것이며 어떤 사고의 구조가 그 행위를 부추기고 합당하다고 하는 것일까?

 

짐작하건데 그것은 ‘닳음’에 대한 경계.

즉‘ 닳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는 인식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무언가 딱 꼬집어 문제가 있다고 말하기 애매해 보이는 이 인식이 걸레를 욕설로써 기능하도록 하는 가장 먼저의 지점이다. ‘닳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이 말은 ‘닳음’을 유의점으로 보는 태도인데, 이는 다소 익숙한 유의점이다. 우리는 이와 유사한 유의점들을 일상 곳곳에서 보아 왔다. 닳을까봐 아껴 신는 새로 산 신발, 닳을까봐 조심해서 읽는 마음에 드는 책, 닳을까봐 책장에 보관해둔 귀여운 토끼 인형, 떼가 타고, 처음의 모습을 잃어 애정이 식게 될지도 모르니 최대한 닳지 않도록 조심해서 보는 태도. 눈살이 살짝 찌푸려진다. 이 유의점을 몸에다 대입한다는 의미는 우리 자신의 몸이 책, 신발, 토끼인형과 동일선상에서 여겨진다는 것인데, 우리의 몸은 ‘닳음’ 이라는 개념 안에서 작동되기에 옳은가?

 

질문이 무색하게도, 지금의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의 몸이 ‘닳음’ 이라는 개념 안에서 작동되어야지만 올바르게 작동되는 것이라는 믿음이 존재하는 듯하다.

 

“네가 너무 소중해서, 닳을까봐 지켜주고 싶어.” 라는 말이 그리 낯선 말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이 문장 역시 ‘닳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라는 인식을 향유하고 있다. ‘몸’ 과 ‘닳음’의 연관성은 너무도 보편적인 통념이라 다소 낭만적인 연인들 간의 사랑의 맹세처럼 사용되지만, 실상 이 말은 영악하다. 언제든 태도를 바꿀 준비가 되어있다. 넌 내가 지켜줄게.”는 “아, 이 걸레야.”를 가능하게 한다. ‘지켜줄게.’ 라는 맹세 바로 뒤에는 ‘야, 이 걸레야,’ 가 존재한다. 당연하게도 이 둘은 전혀 다른 말이지만, 공유하고 있는 지점은 일치하기 때문에. 두 문장 모두 ‘닳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라는 인식에는 이견이 없으며, 무엇보다 “닳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라는 인식이 극대화되는 지점 역시 동일하다. 저 말들은 보통 누구에게 적용되는가? 명백하게, “내가 지켜줄게.” 와 “걸레야.” 라는 말 모두, ‘여성’에게서 극대화된다.

 

우리는 그동안 여성을 ‘함락’ 시키거나, ‘정복’ 하거나, ‘따’ 먹는다는 표현들에 너무 익숙해져왔다. 이 끔찍한 익숙함이 구현하는 ‘여성의 처녀막’부터 ‘순결한 여성’ 이라는 허구는 너무도 방대해서, 마치 사실인양, 그것에 따라야 하는 양, 오랫동안 으스댔다. 몸에 대해서 무지할 것을 요구받은 여성들은 자신의 신체를 조심스럽게 여겨야 했고, 여성들의 신체 부위는 그렇게 ‘미지의 영역’ 으로 묘사되기 일쑤였다. 미지의 영역이라는 말이 거장들에겐 낭만적인 글감으로 여겨졌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지점이 참 의아하다. 미지의 영역이란 말은 모름에서 기인했기에, 그 말을 현상에 대한 문제의식 삼아 신체에 대한 앎, 인식으로 나아가야 되는 것이 아닌가. 어째서 ‘미지의 영역’에 대한 갖은 상상력과 허구들을 만들어 ‘모름’에서 나아갈 수 없도록 소비하기만 했는지 참으로 의아스러울 따름이다. 결국 그 ‘모름’ 에 대한 소비가 무슨 참사를 데리고 왔는지 다들 알지 않던가. 앎으로 나아가지 않았던 통념으로 인해 계속해서 미지의 영역이라 불리는 여성의 신체부위는 조심해야 하는 신성하고 (성적으로) 소중한 것이라고 여겨졌고, 당연하게도 이 인식은 (성적으로) 소중하게 다루지 않았을 때면 반드시 커다란 피해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버렸다. 정말로 기이한 것은, 그 커다란 피해는 고스란히 미지의 영역을 가지고 있던 대상인, 여성이 감내해야만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거다. 하지만 이런 기괴한 구조의 문제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너무 소중해서 (섹스로부터) 지켜주고 싶어.’ 와 ‘야, 이 걸레야.’ 라는 멍청한 문장들이 이 참극을 부추기고 있는 꼴에 울분이 터진다.

 

결국은 몸에 대한 무지이다. ‘모름’을 계속해서 지속시키고, 소비하는 태도들. 우리는 그동안 나 자신의 몸에 대해서 ‘미지의 영역’ 이라고 말하는 데 안주해왔다. 나의 몸을 모르기에 몸을 설명하는 감각이 한정적일 수밖에 없던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에 대해서 닳는다는 감각이 몸을 설명하려고 설치는 걸 놔두고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왜 그래야 하는가?

 

닳지 않는 몸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아니, 몸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을까. 홀로의 시간 속에서 자신의 몸을 마주해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비유나 무엇이 아니라 말 그대로 자신의 몸을 만져보거나 감각을 인식해본 적이 있는지. 어떤 ‘야한’ 통념에 휩싸인 거 말고(‘나는 발기 된 게 왜 이렇게 작은 것 같지…아 여자들은 큰 거 좋아한 댔는데…근데 이거 넣으면 진짜 기분 좋은가’) 그냥 몸을 인식해본 적이 있는지. 예시를 쓰려는 손가락이 한참을 머뭇거린다. 아, 어쩌면 우리는 ‘그냥’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몸을 인식해본 적이 있는지 떠올려본다. 내 가슴 왜 이렇게 작지? 나 다리 왜 이렇게 굵지? 나 발 왜 이렇게 못 생겼지? 나 어깨 왜 이렇게 좁지? 몸은 그동안 이러한 상대적인 비교로만 인식되어 왔다, 그렇기에 ‘그냥’ 몸을 인식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한다.

 

몸에 대해 많은 것들을 모르기에 우리는 여전히 ‘닳는다’ 라는 개념을 전혀 망설임 없이 말한다. 몸에 대해서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지 모르기에. 내가 몸을 가졌다는 사실조차 종종 망각하는 우리는 나의 욕망도 모르고, 나의 감각에도 집중해본 적이 없다. 슬프게도 오로지 ‘나’ 가 가진 것은 야동의 카메라 시선이 몸을 훑는 그 시각과, 제 3자가 바라보고 통념이 부르짖는 욕망들일 뿐이다. 야, 이 걸레야. 라는 말이 왜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정말로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몸을 함부로 굴리는 게 잘못이 아니냐고. 몸은 소중하게 다뤄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 파리한 표정으로 대꾸한다. 몸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말은 섹스로부터 몸을 멀리하라는 뜻으로 들리는 데, 왜 잦은 성관계가 개인에 대한 타당한 비난으로 작용되는 것을 동의하고 있는가? 잦은 성관계가 개인에 대한 비난으로 작용되는 사회에서 결코 개인은 자신의 몸을 긍정하며 살아갈 수 없다. 섹스의 일상성과 보편성에 대한 모습은 전혀 그려지지 않는다. 섹스라는 몸짓이 관계에서 임해질 때의 호혜성과 상호성은 결코 인식되지 않으며 몸에서 이루어지는 감각들은 불순한 것으로 치부되고, 궁극적으로 섹스는 부정된다. 섹스는 일상의 다채로운 상황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그 평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섹스를 특별한 무엇으로 내몰았을 때, 섹스는 수치스러움과 죄책감이라는 문법 속에서만 반복될 수밖에 없다. 여기 이곳에 섹스가 있는데, 어째서 섹스는 나의 몸과 전혀 다른 곳에 있다는 듯이, 감히 몸에 들일 생각조차 하지 말라는 듯이 인식되어야 하는가. 섹스는 나의 몸이 하는 몸짓이다. 왜 그러한 몸짓은 계속해서 부정당해야 하는가?

 

몸에 대한 질문을 다시 던진다. 그 몸이 보이는 몸짓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계속해서 말하지만 우리의 몸이 ‘닳음’ 이라는 통념 속에서 설명되는 것을 멈추기를 바란다. ‘닳음’ 이라는 말이 가져온 결과는 명백한 참극이다. 몸을 ‘닳으므로’ 최대한 아껴야 한다. 몸을 지켜야 한다. 그 아낌과 지킴은 성관계에 한정된 사고에서 이루어지는데, 단순히 성관계를 멀리하는 몸을 아낌과 지킴이라고 여기는 태도가 얼마나 커다란 흉을 일으키는 지 왜 여전히 알지 못할까. 생각해보자. 아낌과 지킴의 방법이 성관계뿐이라는 인식은, 당연히 상대와 나의 감정보다는 성관계의 유무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그렇기에 명백한 성폭행을 저지른 자들이 ‘성관계는 안했어요!’ 라는 자기변호를 지껄이며, ‘성관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걸레’ 라는 욕설로 존재를 깎아내리는 게 오히려 합당한 일인 양 이루어진다.

 

그렇게 섹스를 한 번도 제대로 인식해본 적 없는 상황에서, 서로와 나의 몸에 대한 무지에서 이루어지는 몸짓은 불만족하게, 후회스럽게, 무감하게만 이루어지며 더 나쁠 경우에는 서로와 자신에 대한 용납할 수 없는 감정만을 가져온다. 닳을까봐 아끼고 지키느라 그 누구도 나의 몸에 집중할 수 없고, 나의 감각을 알아차릴 수 없고, 계속해서 미지의 영역으로 놓아둔 채 무엇을 하는 게 몸을 소중하게 대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살아간다. 3인칭의 시각, 나와 우리와 무관한 타자의 시선만으로 나의 몸을 인식할 수밖에 없는 것은 얼마나 비극인가.

 

이럿듯 음울하지만, 고맙게도 이 글의 결론은 기대에 부풀어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몸을 닳는다고 여기지 않았을 때에 대한 상상이 너무도 신나기 때문이다. 잔뜩 들뜬 결론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그러니 이번의 결론은 이 글에서가 아니라, 글 밖에서의 우리가 넘겨받도록 하자. 결론에게 눈을 가리고 신호할 때까지 떼지 말라고 일러두었으니, 결론이 아직 보지 않고 있을 때, 어서 이 상상을 환대하도록 하자. 우리의 결론이 눈을 떼었을 때, 환대받은 상상이 일궈놓을 영향력을 목격하길 기대하면서.

 

@Namin Kwon

Produced by 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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