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민님 칼럼 [학생이 어디서 연애를 해(1)]
2018년 03월 28일 작성

10대인턴 나민님 콘텐츠 #5 칼럼 [학생이 어디서 연애를 해(1)]

 


 

학생이 어디서 연애를 해(1)

 

이 문장은 많은 오해와 왜곡과 불합리가 모여 빚어낸 참사다.

어떻게 여전히 귓가에 들려오는 지 의문이나, 정말로 궁금하기에 갖는 의문은 아니다. 이 문장이 꽤나 지지층이 굳건한 맹목임을 알기에, 참담하게 비꼬는 것이다.

사람과, 장소와, 행위를 이리도 단 한 번에 규정지을 수 있는 대단한 말이 또 어디 있을까.

‘학생’ 과 ‘어디’ 와 ‘연애’ 모든 게 삽시간에 정상적인 무엇 속에서 종결된다.

연애가 가능한 장소도, 사람도, 연애라고 일컬어지는 행위도, 모두 동일한 하나의 정상적인(정상적이라 여겨지는 안이하고 익숙한) 무엇 속에서 판별되고 일축된다. 얼핏 들으면 납득되는 듯한 이 말은 가만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그리도 허무맹랑할 수가 없다. 이런 허무맹랑이 책에, 영화에, 길거리에 판치고 돌아다니니 그리도 많은 장소와 사람과 행위가 쉬이 판단되고 좁아지는 것이며 또 그 좁은 규격 속에 들어가지 못한 장소와 사람과 행위가 아무렇지 않게 쏟아지는 비난을 견뎌내야 되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은 못 참고 노려보는 것이다. 부디 제 자신의 허무맹랑을 알고 부끄러워 영영 도망가기를 바라며.

 

귓가에 들리는 뉘앙스를 먼저 잡아 보자. 학생이 어디서 연애를 해? 라는 문장은 보통 호된 꾸지람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학생이 어디서 연애를 하는 것’ 은 어딘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텐데, 이 꾸지람을 사용하는 자는 그것의 잘못됨을 어디서 확신 얻고 이 말을 ‘호되게’ 내뱉는가?

 

먼저는 이미지일 것이다. 닮은 두 인상착의를 보았을 때 우리가 느낌과 판단에서 자문을 구해야 하는 것은 어느 쪽일까? 가령 짧은 치마라고 가정해보자. 아마 그 자의 맥락을 살피는 게 우선일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우리가 자문을 구하는 쪽은 그 쪽이 아니다. “저 여자가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어요.” 라는 말이 이를 반증한다. 성폭행을 당한 까닭을 찾는 것도 의아하지만, ‘짧은 치마’ 라는 요소가 성폭행과 관련이 있다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의아한 납득력을 보라. ‘짧은 치마’에 대한 느낌과 판단을 성적으로 국한지어 인식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야동의 카메라 시선이 즐겨 포착하는 것은 여성의 자세, 인상착의, 신체 부위와 같은 것들인데 공교롭게도 여성은 야동에만 있는 것이 아닌지라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도 야동의 카메라 시선이 포착하는 것과 일치하는 것은 꽤나 볼 수 있다. 문제는 야동의 카메라가 자세, 옷차림, 신체 부위를 대하는 태도에 우리가 너무도 익숙하다는 것이다. 나는 야동을 안 보는데? 라는 뒷걸음질이 가당치 않을 만큼 야동의 카메라 시선은 모니터 속에, 티비 프로그램 속에, 영화 속에, 책의 구절 속에, 길거리의 말들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재생산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시선을 원래부터 우리의 시선인 양, 자신들의 본능이라고 아끼며, 시선을 아무 의문 없이 답습한다. 그렇게 (특히 야동의 카메라에 자주 ‘훑는’ 여성의) 자세, 인상착의, 신체 부의를 향한 느낌과 판단은 야한, 꼴리는, 빨고 싶은, 유혹하는, 것 같은 류의 야동적인 시선에서 그치는 것이다.

 

익숙한 게 뭐, 라고 되물을 수도 있겠다. 의문 없이 익숙함만을 답습한 시선의 가장 큰 문제는, (당연히 시선이기에 한정된 범위가 존재하므로) 분명 다른 곳에 존재하는 풍경이 배제 되었음에도 무엇이 배제되었는지는 안중에도 없다는 것이다. 다른 풍경에 대한 상상력이 우리에겐 없다. 가령 벽을 치고 팔목을 부여잡는 것은 정말로 ‘설레기’ 만할까? 오로지 ‘우악스럽게 팔을 잡아끄는 남성의 모습에 설렌다.’ 라는 시선만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설렘을 유발하고자 그러한 행동을 흉내는 자들이 많을 것이며, 그 행동에서 설레지 않은 자들은 이상스러운 존재로서 여겨지거나 두려움을 느끼는 스스로를 검열하며 자책할 것이다. 설레지 못한 자들은 설레는 척을 할 것이며, 그 외의 설렘에 대해서 지지부진한 자들은 더 큰 설렘을 유발하고자 더 과하게 이 행동만을 묘사할 것이다. (어딘가 참 익숙한 상황이다.)

 

이러한 비극에서, 만약 우리가 시선의 한정됨을 인식하고 다른 곳에 존재하는 풍경을 바라본다면, 다시 말해 개인의 노력 부족과도 같은 탓으로 돌리지 않고 ‘우악스럽게 팔을 잡아끄는 남성의 모습은 설레지 않다.’ 라는 다른 시선을 찾아내나면, 다른 설렘의 가능함이 밀려오면서 흉내를 그치고 자신이 설레는 다른 것들을 보다 주의 깊게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설렘의 가짓수가 늘어나면서 더 많은 상황에서 더 많은 이들이 기쁘게 가슴 뛸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풍경을 인식하는 중요성은 이곳에 있으나 익숙한 시선의 문제는 이러한 중요성을 놓친다는 데 있다.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 보자. “학생이 어디서 연애를!” 이라는 호통은 그동안 반복되던 야동의 카메라 시선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 시선에서 이루어지며, 그 익숙한 시선이 배제시킨 그 외의 풍경을 염두 하지 않기에 연애하는 학생들에 대한 다른 생각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확신 가득한 시선은 얼마나 많은 흉을 남기던가. 쉬이 내뱉는 ‘발랑 까졌다.’ 라는 말은 얼마나 빈곤한 상상력에서 이루어지는 가. 답습하는 야동의 카메라 시선이 꼴보기 싫으면서도, 한 치를 벗어나지 못하는 그 빈곤함에 서글퍼지는 것이다.

 

 

*제 (2)로 이어집니다.

 

 

@Namin Kwon

Produced by 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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